
ROMANIA — 동유럽과 남동유럽의 경계에 자리한 루마니아는 카르파티아산맥과 다뉴브강, 흑해를 품은 나라다. 로마제국과 다키아왕국의 역사를 국가 정체성의 뿌리로 삼으며, 슬라브계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라틴계 언어를 사용하는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한다.
북쪽과 동쪽으로 우크라이나·몰도바, 남쪽으로 불가리아, 남서쪽으로 세르비아, 서쪽으로 헝가리와 국경을 맞대며 남동쪽은 흑해에 접한다. 국토 중앙에는 카르파티아산맥이 활처럼 휘어 있고 산맥 안쪽에 트란실바니아고원이 자리한다.
수도는 부쿠레슈티, 공용어는 루마니아어이며 화폐는 루마니아레우(RON)를 사용한다. 유럽연합 회원국이지만 아직 유로를 공식 화폐로 도입하지 않았다. 유엔인구기금에 따르면 2025년 인구는 약 1,890만 명이다.
현재 대통령은 수학자·시민운동가 출신의 니쿠쇼르 단이다. 2025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돼 같은 해 5월 취임했다. 2026년 현재 정부는 의회의 불신임으로 물러난 일리에 볼로잔 총리가 새 내각 구성 전까지 관리정부를 이끄는 정치적 과도기를 겪고 있다.
‘동유럽의 작은 파리’, 부쿠레슈티
부쿠레슈티는 루마니아 남부 왈라키아평원에 자리한 수도이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다. 국가 인구의 약 10분의 1이 이 도시와 주변 광역권에 거주한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프랑스식 대로와 신고전주의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동유럽의 작은 파리’라고 불렸다. 개선문과 아테네음악당, 국립은행과 왕궁 등에서 당시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도시의 구시가지 립스카니는 상인과 장인들의 거리에서 출발했다. 오스만과 발칸·중앙유럽의 교역문화가 만났으며 오늘날에는 식당과 카페·공연장이 밀집한 관광지역이다.
부쿠레슈티의 도시경관에는 20세기 공산주의의 흔적도 강하게 남아 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80년대 거대한 관청지구와 대로를 건설하기 위해 역사적인 주택과 교회·동네를 대규모로 철거했다.
그 중심에 있는 의회궁은 세계에서 가장 큰 행정건물 가운데 하나다. 현재 루마니아 의회가 사용하지만 건설 과정에서 주민 강제이주와 막대한 국가재정, 시민의 희생이 뒤따랐다는 점에서 독재의 상징이기도 하다.
산맥이 국토를 감싸는 나라
카르파티아산맥은 루마니아 국토 중앙을 활 모양으로 둘러싼다. 동카르파티아·남카르파티아·서루마니아카르파티아로 나뉘며 트란실바니아의 자연적 경계를 형성한다.
최고봉은 남카르파티아 파가라슈산맥의 몰도베아누봉으로 해발 약 2,544미터다. 주변에는 빙하호와 고산초원, 가파른 계곡이 펼쳐진다.
산악도로 트란스파가라샨은 차우셰스쿠 시대에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됐다. 급경사의 굽은 도로와 고산경관으로 유명하지만 겨울에는 폭설과 눈사태 위험 때문에 폐쇄되는 구간이 많다.
카르파티아산맥에는 유럽에서 규모가 큰 불곰·늑대·스라소니 개체군이 서식한다. 숲과 전통적인 농촌경관이 비교적 넓게 남아 있지만 불법벌목과 도로·관광시설 개발이 생태계를 위협한다.
농촌에서는 가축 방목과 건초 수확, 숲에서 버섯과 열매를 채취하는 생활이 이어진다. 인간과 곰의 생활공간이 겹치면서 인명피해와 야생동물 관리 문제도 커지고 있다.
유럽을 가로지르는 다뉴브강
다뉴브강은 독일에서 시작해 중부·동남유럽 여러 국가를 지나 흑해로 흘러든다. 루마니아 남부에서는 불가리아와의 국경 대부분을 형성한다.
강은 농업용수와 수력발전, 어업과 물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르비아와 공동으로 건설한 철문댐은 다뉴브강의 대표적인 수력발전시설이다.
철문협곡은 카르파티아산맥과 발칸산맥 사이를 다뉴브강이 통과하는 지점이다. 고대 로마의 도로와 다리 흔적, 절벽에 새겨진 다키아왕 데케발루스의 거대한 얼굴 조각을 볼 수 있다.
다뉴브강은 루마니아 동쪽 끝에서 여러 물길로 갈라져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한다.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습지 가운데 하나다.
새들의 낙원, 다뉴브삼각주
다뉴브삼각주는 갈대밭과 호수·수로·섬이 복잡하게 연결된 생태계다.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에 걸쳐 있으며 강이 운반한 퇴적물이 쌓이면서 지금도 지형이 변하고 있다.
펠리컨과 가마우지·왜가리 등 수백 종의 조류가 서식하거나 이동 중에 머문다. 철갑상어와 여러 민물고기, 수달과 야생고양이 등도 살아간다.
삼각주 안의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배를 이용해 이동하고 어업과 갈대채취·관광으로 생활한다. 러시아계 구교도 공동체인 리포반인도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독특한 종교와 어업문화를 유지해왔다.
다뉴브삼각주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과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농약과 산업폐수, 플라스틱 쓰레기·밀렵과 상류의 댐이 생태계에 영향을 준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흑해의 군사적 긴장도 삼각주와 인근 항만의 안전에 새로운 부담을 주고 있다.
루마니아인은 왜 라틴계 언어를 사용할까
루마니아어는 이탈리아어·프랑스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와 같은 로망스어군에 속한다. 동유럽의 슬라브계 언어와 헝가리어 사용지역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기본 어휘와 문법의 중심은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나라 이름 ‘루마니아’도 로마인 또는 로마의 땅을 뜻하는 표현과 연결된다.
그러나 루마니아어는 라틴어만으로 만들어진 언어가 아니다. 다키아계 언어의 흔적과 슬라브어·그리스어·터키어·헝가리어·독일어 등의 영향을 받았다.
중세에는 키릴문자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19세기 국민국가 형성과 함께 라틴문자가 완전히 정착했다. 같은 동부로망스어 계통의 아로마니아어·메글레노루마니아어 등도 발칸 여러 지역에 남아 있다.
몰도바공화국의 공용어도 본질적으로 루마니아어다. 소련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몰도바어’라는 명칭과 키릴문자가 사용됐지만 현재 몰도바 헌법은 공용어를 루마니아어로 규정한다.
헝가리인·로마인과 여러 소수민족
루마니아인의 비중이 가장 크지만 헝가리인과 로마인, 우크라이나인·독일인·튀르키예계 타타르인 등 다양한 공동체가 살아간다.
헝가리계 주민은 주로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한다. 특히 세클레르 지역에서는 헝가리어가 일상생활과 교육·지역행정에서 널리 사용된다.
헝가리계 정당은 루마니아 의회와 연립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언어교육과 행정자치, 지역상징의 사용을 둘러싸고 중앙정부나 민족주의 세력과 갈등하기도 한다.
로마인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지만 실제 인구는 공식통계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차별을 우려해 인구조사에서 정체성을 밝히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로마인 공동체는 주거와 교육·고용·의료에서 높은 수준의 차별과 빈곤을 경험한다. ‘루마니아인’과 ‘로마인’은 이름이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국가의 다수민족, 후자는 유럽 여러 지역에 사는 고유한 역사와 언어를 가진 민족이다.
다키아왕국과 로마제국
오늘날 루마니아 지역에는 고대 게타이·다키아인들이 생활했다. 이들은 트라키아계 언어를 사용하며 농업과 금속가공·무역을 발전시켰다.
기원전 1세기 부레비스타왕은 여러 부족을 통합해 강력한 다키아왕국을 세웠다. 이후 데케발루스왕은 로마제국의 팽창에 맞서 싸웠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101∼102년과 105∼106년 두 차례 전쟁 끝에 다키아왕국을 정복했다. 로마는 카르파티아산맥의 금과 은·소금 등 자원을 확보하고 다키아속주를 설치했다.
로마의 군인과 행정관·상인·정착민이 들어오면서 라틴어와 도시문화가 확산됐다. 루마니아인은 다키아인과 로마인의 결합을 민족 형성의 중요한 기원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로마가 다키아를 통치한 기간은 약 170년에 불과했고 이후 이주와 전쟁도 반복됐다. 현대 루마니아 민족의 형성은 로마시대 이후 수백 년의 복잡한 변화까지 포함한다.
다키아요새와 로마 국경의 세계유산
오러슈티에산맥에는 다키아왕국의 정치·군사·종교 중심지였던 여러 요새가 남아 있다. 가장 중요한 유적은 사르미제게투사 레기아다.
산 정상과 능선에 성벽과 신전·주거지·작업장이 건설됐다. 다키아인의 석조기술과 금속가공, 산악지형을 활용한 방어체계를 보여준다.
여섯 개의 다키아요새는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불법적인 유물탐사와 약탈, 접근시설과 관리인력 부족이 보존의 과제로 지적된다.
2024년에는 로마제국의 다키아 국경유적이 별도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요새와 감시탑·성벽·도로 등 수백 개의 지점이 광범위한 국경방어체계를 구성한다.
다키아요새와 로마국경 유적은 루마니아 국가 정체성의 두 뿌리를 함께 보여준다. 하나는 로마 이전의 다키아, 다른 하나는 라틴어와 로마문화가 들어온 제국의 시대다.
왈라키아·몰다비아·트란실바니아
로마군이 철수한 뒤 오늘날 루마니아 지역에는 고트족과 훈족·아바르족·슬라브족·마자르족 등 여러 집단이 이동하고 정착했다.
중세에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라는 세 지역이 서로 다른 정치적 역사를 발전시켰다.
왈라키아는 카르파티아산맥 남쪽과 다뉴브강 사이에 형성됐다. 몰다비아는 동카르파티아와 드네스트르강 사이에서 발전했으며 현재의 루마니아 동부와 몰도바공화국·우크라이나 일부를 포함했다.
트란실바니아는 헝가리왕국의 지배와 오스만제국의 영향, 합스부르크 통치를 차례로 경험했다. 헝가리인과 세클레르인, 독일계 작센인·루마니아인이 함께 생활했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는 오스만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국이 됐지만 완전히 직접 통치되지는 않았다. 자체 군주와 정교회·귀족제도를 유지했다.
드라큘라와 실제 블라드 3세
루마니아를 세계적으로 알린 인물 가운데 하나는 ‘가시공’ 블라드 3세다. 그는 15세기 왈라키아의 군주로 여러 차례 왕위에 올랐다.
블라드는 오스만제국과 국내 귀족·주변 국가를 상대로 권력을 지키려 했다. 적을 말뚝에 박아 처형하는 잔혹한 방식 때문에 ‘체페슈’, 즉 가시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 블라드 2세는 용의 기사단에 가입해 ‘드라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드라큘라’는 원래 ‘드라쿨의 아들’이라는 뜻과 연결된다.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는 1897년 소설 『드라큘라』에서 트란실바니아의 흡혈귀 백작을 창조했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과 실제 블라드 3세의 삶이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브란성은 흔히 ‘드라큘라성’으로 홍보되지만 블라드가 이곳에 거주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성의 고딕적인 모습과 트란실바니아라는 위치가 관광 이미지와 결합한 것이다.
루마니아에서는 블라드를 잔혹한 독재자로만 보기보다 외세와 부패한 귀족에 맞선 강력한 군주로 기억하는 시각도 있다.
몰다비아의 슈테판대공
15세기 몰다비아의 슈테판대공은 오스만제국과 폴란드·헝가리 사이에서 공국의 독립성을 지키려 했다.
그는 수십 차례의 전투와 외교를 통해 영토를 방어했고 승리 뒤에는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루마니아와 몰도바에서 국민적 영웅이자 정교회의 성인으로 존경받는다.
북부 부코비나의 수도원과 교회 외벽에는 성경과 성인·최후의 심판 장면을 그린 화려한 프레스코가 남아 있다.
보로네츠수도원의 선명한 파란색은 ‘보로네츠블루’라고 불린다. 글을 읽지 못하는 주민도 그림을 통해 성경과 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외벽 전체를 거대한 그림책처럼 구성했다.
몰다비아의 여덟 개 교회는 비잔티움미술과 지역의 건축·회화 전통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미하이 용감공과 세 공국의 결합
왈라키아의 미하이 용감공은 16세기 말 오스만제국에 맞서 싸웠다. 1600년에는 잠시 왈라키아·트란실바니아·몰다비아를 모두 장악했다.
그의 통합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현대적 민족국가를 세우려는 계획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왕조와 군사·귀족정치가 중심이었으며 주민 전체를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민족주의 개념이 자리 잡기 전이었다.
그럼에도 19세기 루마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미하이를 세 지역을 처음 통합한 지도자로 기억했다. 현대 루마니아에서도 국가통합의 선구자로 기념된다.
이 사례는 과거의 정치적 사건이 후대의 국가 정체성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공국의 통합과 루마니아 탄생
19세기 오스만제국이 약해지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프랑스 등 열강이 발칸지역에서 경쟁하면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민족운동이 성장했다.
1859년 두 공국은 모두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를 군주로 선출했다. 형식적으로 별도 국가였지만 같은 군주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통합을 이루었다.
1862년 국호를 루마니아로 정하고 부쿠레슈티를 수도로 삼았다. 쿠자는 농노적 의무 폐지와 수도원 토지의 국유화, 교육·사법개혁을 추진했다.
정치적 반대세력에 의해 쿠자가 퇴위한 뒤 독일 호엔촐레른가 출신의 카롤 1세가 군주가 됐다.
루마니아는 러시아–오스만전쟁에 참여한 뒤 1878년 베를린회의에서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1881년에는 왕국을 선포하고 카롤 1세가 국왕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과 ‘대루마니아’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중립을 유지하다가 1916년 협상국 편에 참전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트란실바니아를 얻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격으로 부쿠레슈티가 점령되고 정부와 왕실은 야시로 피란했다. 전쟁과 질병·기근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918년 동맹국이 패배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제국이 해체되면서 트란실바니아와 부코비나·베사라비아가 루마니아에 결합했다.
영토와 인구가 크게 늘어난 이 시기의 국가를 ‘대루마니아’라고 부른다. 1918년 12월 1일 트란실바니아의 통합선언일은 현재 루마니아 국경일이다.
그러나 확대된 영토에는 헝가리인과 독일인·우크라이나인·유대인·불가리아인 등 많은 소수민족이 살았다. 루마니아 민족국가 건설은 이들의 언어와 정치적 권리를 둘러싼 갈등을 낳았다.
파시즘과 안토네스쿠 독재
전간기 루마니아는 의회민주주의를 운영했지만 정치불안과 부패, 경제위기와 극단주의가 심화됐다.
극우단체 철위대는 정교회 신비주의와 민족주의·반유대주의·폭력을 결합했다. 정치인을 암살하고 유대인과 반대세력을 공격했다.
1940년 소련과 헝가리·불가리아에 영토를 잃으면서 카롤 2세의 왕정이 붕괴했다. 이온 안토네스쿠 장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
루마니아군은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에 참여해 베사라비아를 되찾고 우크라이나 깊숙이 진격했다.
안토네스쿠 정권과 군·행정기관은 유대인과 로마인 학살·강제추방에 책임이 있다. 이아시 학살과 트란스니스트리아 수용지에서 수십만 명이 희생됐다.
북트란실바니아에서는 당시 지역을 통치한 헝가리 정부가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등으로 추방했다. 루마니아 홀로코스트는 독일군만이 아니라 국내 정권과 기관이 직접 가담한 역사로 기억해야 한다.
국왕의 정변과 전쟁의 방향 전환
1944년 소련군이 접근하자 젊은 미하이 1세 국왕은 안토네스쿠를 체포하고 독일과의 동맹을 끝냈다.
루마니아는 연합국 편으로 전환해 독일군과 헝가리군에 맞서 싸웠다. 이 결정은 전쟁기간을 줄이고 북트란실바니아를 되찾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국토를 점령한 상황에서 루마니아의 정치적 선택은 제한됐다. 공산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부와 경찰·행정기관을 장악했다.
1947년 미하이 1세는 공산정부의 압력으로 퇴위했고 루마니아인민공화국이 선포됐다. 왕실은 해외로 추방됐다.
공산화와 강제수용소
공산정부는 왕정과 야당을 폐지하고 기업과 토지를 국유화했다. 농업 집단화 과정에서 농민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저항자를 체포했다.
정치인과 성직자·지식인·기업가·농민들이 감옥과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시게트교도소와 다뉴브–흑해운하 건설현장은 공산주의 탄압의 대표적인 장소다.
초기 지도자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는 소련식 산업화와 비밀경찰 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소련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독자노선을 추구했다.
1965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공산당 지도자가 됐다. 처음에는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비판해 국내외에서 개혁적인 지도자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과 가족에게 권력을 집중하고 개인숭배와 비밀경찰의 감시를 강화했다.
차우셰스쿠의 인구정책
차우셰스쿠 정부는 인구를 늘리기 위해 1966년 낙태와 피임을 강하게 제한하는 법령을 도입했다.
일정한 자녀 수가 없는 여성의 임신 여부를 직장에서 검사하고 임신중절을 한 여성과 의료인을 처벌했다. 출산은 개인의 선택보다 국가의 노동력 확대정책으로 다뤄졌다.
정책 초기에는 출생아가 급증했지만 원치 않는 임신과 불법시술로 많은 여성이 목숨을 잃었다. 경제적으로 자녀를 양육할 수 없는 부모가 아이를 국가시설에 맡기기도 했다.
보육시설은 과밀하고 의료·영양과 돌봄이 부족했다. 1989년 정권 붕괴 뒤 열악한 고아원과 장애아동 시설이 공개되며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루마니아의 경험은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여성의 신체와 선택을 국가가 강제로 통제할 때 얼마나 심각한 인권·보건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빚을 갚기 위해 가난해진 사회
1970년대 차우셰스쿠 정부는 서방에서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 중공업과 발전소·화학공장을 건설했다.
1970년대 말 국제유가와 금리가 오르면서 외채부담이 커졌다. 차우셰스쿠는 외채를 완전히 상환하기 위해 식량과 연료·공산품의 수출을 늘리고 국내 소비를 극도로 제한했다.
1980년대 주민들은 식량배급과 난방·전력 제한을 겪었다. 겨울에도 아파트 난방이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고 상점 진열대가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수도에는 거대한 인민궁전과 관청지구가 건설됐다. 농촌에서는 여러 마을을 철거하고 주민을 집단주택으로 옮기려는 체계화정책이 추진됐다.
비밀경찰 세쿠리타테는 주민과 종교단체·지식인을 감시했다.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공포가 결합하면서 정권에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쌓였다.
1989년 혁명과 독재자의 최후
1989년 12월 서부 도시 티미쇼아라에서 헝가리계 개혁파 목사 라슬로 퇴케시의 강제퇴거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는 곧 차우셰스쿠 독재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쳤고 보안군은 발포했다. 희생자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부쿠레슈티와 다른 도시로 시위가 확산됐다.
차우셰스쿠는 부쿠레슈티에서 대규모 관제집회를 열어 정권의 힘을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군중이 야유를 보내면서 생중계 연설이 무너졌고 독재체제의 권위도 순식간에 흔들렸다.
군 일부가 시위대 편으로 돌아서자 차우셰스쿠 부부는 헬리콥터로 탈출했지만 곧 체포됐다. 두 사람은 짧은 군사재판을 받은 뒤 12월 25일 총살됐다.
혁명 과정에서 1천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 차우셰스쿠가 도망친 뒤에도 총격이 이어졌으며 누가 누구에게 발포했는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 많다.
독재의 종식은 자유를 가져왔지만 즉결재판과 혁명기의 폭력, 옛 공산당 엘리트가 새 체제에서도 권력을 유지했다는 문제를 남겼다.
민주화와 광부들의 부쿠레슈티 진입
차우셰스쿠 정권 붕괴 뒤 구국전선이 권력을 장악했다. 공산당 출신 이온 일리에스쿠가 대통령이 되면서 옛 체제와의 단절이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왔다.
1990년 부쿠레슈티 대학광장에서는 민주화와 공산당 출신 인사의 정치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됐다.
정부의 요청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광부들이 수도로 들어와 시위대와 야당 사무실·언론사를 공격했다. 이 사건은 ‘미네리아드’라고 불린다.
1990년대 루마니아는 시장경제 전환 과정에서 물가상승과 실업, 국영기업의 폐쇄와 부패를 겪었다. 많은 주민이 생활수준 하락과 불확실성을 경험했다.
점진적인 제도개혁과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민주주의가 자리 잡았지만 사법·행정에 남은 공산시대의 인맥과 정치권의 부패는 오랫동안 문제가 됐다.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나누는 정치
루마니아는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나누는 반대통령제 공화국이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며 임기는 5년이다.
대통령은 외교·국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총리 후보를 지명한다. 총리와 내각은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의회의 신임을 받아 국내행정을 운영한다.
대통령과 총리가 다른 정치세력에 속하면 외교와 검찰·정보기관·정부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2024년 대통령선거 1차 투표에서는 무소속 극우 후보 컬린 제오르제스쿠가 예상 밖의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선거운동의 불법성과 외국의 디지털 개입 의혹 등을 이유로 전체 선거를 무효화했다.
이 결정은 선거의 공정성을 보호했다는 평가와 법원이 국민의 선택을 취소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불러왔다.
2025년 다시 실시된 선거에서는 친유럽 중도 성향의 니쿠쇼르 단이 민족주의 후보 제오르제 시미온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2026년에는 재정긴축과 연정 갈등으로 볼로잔 정부가 의회의 불신임을 받았다. 새 총리 후보들이 의회 신임을 얻지 못하면서 볼로잔이 관리총리로 남아 있는 정치적 교착이 이어지고 있다.
나토와 유럽연합 가입
루마니아는 민주화 이후 서유럽의 정치·경제·안보체제에 합류하는 것을 국가전략으로 삼았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고 2007년 불가리아와 함께 유럽연합 회원국이 됐다.
유럽연합 가입은 도로와 철도·상하수도·농촌개발에 대규모 자금을 제공했다. 기업들은 유럽 단일시장에 접근하고 시민들은 다른 회원국에서 자유롭게 공부하고 일할 수 있게 됐다.
2024년 3월 항공과 해상 국경에 대한 솅겐협정이 적용됐고 2025년 1월 육상 국경검문도 폐지되면서 완전한 솅겐 회원국이 됐다.
하지만 유럽연합 기금을 둘러싼 부패와 행정력 부족, 사법개혁과 재정적자는 계속 해결해야 할 과제다.
유로 도입을 장기목표로 삼고 있지만 물가와 재정·경제구조의 조건을 충족해야 하므로 공식적인 도입시점은 확정되지 않았다.
흑해와 우크라이나 전쟁
루마니아는 흑해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우크라이나·튀르키예와 연결된다. 항구도시 콘스탄차는 흑해와 다뉴브강, 중부유럽을 잇는 전략적 물류거점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루마니아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이고 곡물과 물자의 수송을 지원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다뉴브강 항구를 공격하면서 드론 잔해가 루마니아 영토에서 발견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에 따라 국경감시와 방공능력 강화가 중요한 과제가 됐다.
나토는 루마니아에 프랑스군이 주도하는 다국적 전투단을 배치했다. 미사일방어시설과 흑해의 해군·공군기지 역시 지역안보에서 큰 역할을 한다.
루마니아 정부는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면서 몰도바와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을 지지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전쟁지원과 국방비, 생활비 문제를 둘러싼 피로감과 민족주의도 성장하고 있다.
몰도바와 닮고도 다른 관계
루마니아와 몰도바는 같은 루마니아어와 많은 역사·문화적 전통을 공유한다. 몰도바의 대부분은 과거 몰다비아공국의 일부였다.
현재 몰도바 영토의 중심인 베사라비아는 1812년 러시아제국에 편입됐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 루마니아와 통합됐다. 1940년 소련이 다시 점령해 몰도바소비에트공화국을 만들었다.
1991년 몰도바가 독립한 뒤 두 나라 사이에서는 통합론과 별개의 국가 정체성이 함께 존재해왔다.
루마니아는 몰도바 시민에게 혈통과 과거 시민권을 근거로 루마니아 국적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한다. 많은 몰도바인이 루마니아 여권을 통해 유럽연합에서 공부하고 일한다.
하지만 몰도바 국민 모두가 루마니아와의 통합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어 사용 주민과 가가우즈인·우크라이나인 등 다양한 공동체도 존재한다.
루마니아는 몰도바의 독립과 유럽연합 가입을 공식적으로 지원한다. 언어와 역사적 친밀성은 강하지만 두 나라는 국제적으로 별개의 주권국가다.
트란실바니아의 요새교회
트란실바니아는 카르파티아산맥 안쪽의 고원지역이다. 루마니아인과 헝가리인·세클레르인, 독일계 작센인이 함께 살아온 다문화지역이다.
중세 헝가리왕들은 국경과 교역로를 방어하고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독일계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들은 브라쇼브와 시비우·시기쇼아라 등 상업도시를 건설했다.
농촌의 독일계 주민들은 오스만군과 약탈에 대비해 교회 주변에 높은 성벽과 탑·식량창고를 만들었다. 평상시에는 예배를 드리고 위기에는 마을 전체가 피신하는 요새였다.
비에르탄과 비스크리 등 일곱 곳의 요새교회 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시기, 특히 1989년 이후 많은 독일계 주민이 독일로 이주했다. 비어 있는 집과 교회를 보존하면서 남은 주민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중세도시 시기쇼아라
시기쇼아라는 독일계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이 세운 중세 요새도시다. 언덕 위의 성벽과 탑·좁은 골목, 색색의 주택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도시의 상징은 시계탑이다. 과거 시의회와 방어시설로 사용됐으며 현재는 역사박물관과 전망대가 들어서 있다.
각 방어탑은 대장장이와 재단사·구두장이 등 직업별 길드가 관리했다. 상업과 수공업 조직이 도시방위에도 참여한 중세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블라드 3세가 어린 시절 이곳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의 아버지가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 집도 남아 있다. 그러나 시기쇼아라의 가치는 드라큘라 이야기보다 실제 중세 도시생활을 보존했다는 데 있다.
역사중심지는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현재도 주민이 살아가는 도시이기 때문에 관광과 주거·건축물 보존의 균형이 필요하다.
마라무레슈의 목조교회
루마니아 북부 마라무레슈는 산과 숲, 전통농촌문화로 알려진 지역이다. 높은 첨탑을 가진 목조교회들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돌로 정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이 제한됐던 역사적 환경에서 주민들은 풍부한 목재와 뛰어난 목공기술을 활용해 교회를 지었다.
교회 내부에는 성경과 성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벽화와 이콘이 그려져 있다. 건물은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목재를 정교하게 결합해 세운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여덟 개 목조교회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높은 지붕과 가느다란 첨탑은 자연스럽게 마을의 중심이자 길잡이 역할을 한다.
마라무레슈에서는 조각된 목조대문과 전통의상·직물, 건초더미와 수작업 농업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청년이 도시와 해외로 떠나면서 전통기술과 농촌경관의 전승이 어려워지고 있다.
호레주수도원과 브른코베네스크 양식
왈라키아의 군주 콘스탄틴 브른코베아누는 1690년 호레주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루마니아 고유의 브른코베네스크 건축양식을 대표한다.
비잔티움의 종교건축과 오스만·발칸의 장식, 르네상스와 바로크적 요소가 결합됐다. 균형 잡힌 건물과 섬세한 돌조각·회랑, 벽화가 특징이다.
수도원에는 성화와 벽화 제작을 가르치는 예술학교가 형성돼 왈라키아와 발칸지역의 교회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호레주수도원은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인근 마을은 흰 바탕에 갈색·초록·파랑 무늬를 그리는 호레주도자기로 유명하다.
호레주도자기 제작기술은 별도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도공과 장식가가 역할을 나누어 전통문양을 완성한다.
광산과 역사가 충돌한 로시아몬타나
트란실바니아의 로시아몬타나는 로마시대부터 금을 채굴한 광산지역이다. 산속에는 고대 로마의 지하갱도와 정착지·묘지·제단이 남아 있다.
현대에 대규모 노천금광 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마을과 산, 고대유적이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광산회사는 일자리와 투자를 강조했지만 환경단체와 주민들은 시안화물을 사용하는 채굴방식과 강제이주, 문화유산 훼손에 반대했다.
반대운동은 루마니아의 대표적인 환경·시민운동으로 성장했다. 정부정책과 외국기업, 지역의 경제적 필요와 문화유산 보존을 둘러싼 전국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로시아몬타나 광산경관은 202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동시에 등재됐다.
이곳은 오래된 광산유산을 보호하면서 일자리가 부족한 지역에 어떤 경제적 대안을 제공할 것인지 묻는 장소다.
브른쿠시가 만든 현대조각의 길
콘스탄틴 브른쿠시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현대조각의 선구자다. 사물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 본질적인 형태를 단순한 곡선과 덩어리로 표현했다.
그의 대표작에는 「새」와 「입맞춤」, 「잠자는 뮤즈」 등이 있다. 매끄러운 표면과 간결한 형태는 20세기 추상조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향과 가까운 트르구지우에는 제1차 세계대전 희생자를 기리는 야외기념물군을 만들었다.
「침묵의 탁자」와 「입맞춤의 문」·「끝없는 기둥」이 도시의 긴 축을 따라 배치된다. 죽음과 기억에서 사랑과 영원으로 이어지는 상징적 공간으로 해석된다.
트르구지우의 브른쿠시 기념물군은 202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루마니아의 전통 조형감각이 세계 현대미술로 확장된 사례다.
열한 곳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루마니아에는 2026년 현재 열한 곳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있다. 아홉 곳은 문화유산, 두 곳은 자연유산이다.
문화유산은 몰다비아 교회군과 오러슈티에산맥의 다키아요새, 로마제국 다키아 국경, 시기쇼아라 역사중심지와 호레주수도원, 로시아몬타나 광산경관, 트란실바니아 요새교회 마을과 마라무레슈 목조교회, 트르구지우의 브른쿠시 기념물군이다.
자연유산은 다뉴브삼각주와 여러 유럽 국가가 공동으로 보유한 ‘카르파티아 및 유럽의 고대 원시 너도밤나무숲’이다.
세계유산은 다키아와 로마, 정교회와 독일계 정착민, 광업과 현대미술까지 루마니아 역사의 다양한 층을 보여준다.
유산의 수보다 중요한 문제는 실제 보존이다. 불법건축과 벌목·광산개발, 관광객 증가와 농촌인구 감소로부터 유산과 주민공동체를 함께 보호해야 한다.
정교회와 종교문화
루마니아인의 다수는 동방정교회를 믿는다. 루마니아정교회는 독립된 총대주교좌를 두며 국가의 역사와 문화·일상생활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다.
마을의 세례와 결혼·장례, 부활절과 성탄절 행사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부활절 밤에는 신자들이 촛불을 밝히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라는 인사를 나눈다.
공산주의 정부는 교회를 통제하고 일부 성직자를 탄압했지만 소련처럼 종교활동을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았다. 일부 교회 지도자는 정권과 협력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민주화 이후 교회는 학교와 병원·사회복지, 미디어와 정치적 논쟁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부쿠레슈티에는 대규모 국민구원대성당도 건설됐다.
가톨릭과 그리스가톨릭·개신교, 이슬람교와 유대교 공동체도 존재한다. 트란실바니아와 도브루자에서는 지역의 역사에 따라 종교 분포가 다양하다.
전통마을과 살아 있는 민속문화
루마니아 농촌에서는 지역마다 다른 전통의상과 자수·목공·도자기·가면문화가 발달했다.
여성의 블라우스 ‘이에’에는 지역과 마을·가족에 따라 다른 기하학적 문양과 색을 수놓는다.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전통 블라우스 제작기술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겨울축제에서는 곰이나 염소·말을 표현한 가면을 쓰고 춤춘다. 북동부의 곰춤은 강한 북소리와 함께 오래된 해의 악을 몰아내고 새로운 해를 맞는 의례다.
‘머르치쇼르’는 3월 1일 빨간색과 흰색 실로 만든 장식물을 선물하며 봄을 맞는 전통이다. 불가리아·몰도바·북마케도니아와 함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도이나는 개인의 슬픔과 사랑·그리움을 즉흥적으로 표현하는 전통노래다. 느리고 장식적인 선율로 농촌과 목동문화의 감정을 전달한다.
체조와 테니스·축구의 나라
루마니아 스포츠를 세계에 알린 대표적인 인물은 체조선수 나디아 코마네치다. 그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체조 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았다.
당시 전광판은 10점을 표시하도록 설계되지 않아 ‘1.00’으로 나타났다. 코마네치는 여러 종목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세계 체조의 기준을 바꾸었다.
여자체조 대표팀은 이후에도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 강한 경쟁력을 보였다. 그러나 선수에 대한 가혹한 훈련과 통제, 지도자의 폭력 문제도 함께 돌아봐야 한다.
테니스에서는 일리에 너스타세와 시모나 할레프가 세계 정상급 선수로 활동했다. 축구에서는 게오르게 하지가 1990년대 대표팀의 황금세대를 이끌었다.
축구는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지만 구단재정과 경기장 폭력, 운영의 투명성 문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다치아 자동차와 제조업
루마니아 경제는 민주화 이후 농업과 중공업 중심에서 자동차·기계·전자·정보기술과 서비스업으로 다양해졌다.
자동차회사 다치아는 1960년대 프랑스 르노의 기술을 바탕으로 출발했다. 민주화 이후 르노그룹에 인수돼 로간과 더스터·산데로 등을 생산하는 유럽의 대형 자동차 브랜드로 성장했다.
포드도 크라이오바 공장에서 자동차와 엔진을 생산한다. 자동차와 부품산업은 루마니아 수출과 제조업 고용의 핵심이다.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티미쇼아라·야시에서는 정보기술과 소프트웨어·공유서비스 산업이 발전했다. 높은 수학·공학 교육수준과 유럽시장 접근성이 강점이다.
그러나 외국기업의 생산기지에 머물지 않고 국내 기업과 연구개발·브랜드를 성장시키는 것이 장기적인 과제다.
흑해의 항구와 에너지
콘스탄차는 루마니아 최대의 항구이자 흑해에서 중요한 물류거점이다. 다뉴브–흑해운하와 철도·도로를 통해 중부유럽과 연결된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콘스탄차항은 우크라이나산 곡물과 국제지원 물자를 운송하는 핵심 통로가 됐다.
루마니아는 천연가스와 석유·석탄, 수력·원자력과 풍력 등 비교적 다양한 에너지원을 보유한다.
흑해 해저의 천연가스 개발사업은 국내 에너지 공급과 유럽의 러시아산 가스 의존 축소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해양생태계와 탄소배출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체르나보다원전은 캐나다형 중수로를 사용한다. 정부는 원전 설비 확대와 소형모듈원자로 도입을 추진하면서 에너지 안보와 온실가스 감축을 함께 강조한다.
유럽으로 떠난 수백만 명
유럽연합 가입 이후 많은 루마니아인이 이탈리아와 스페인·독일·영국 등으로 일하러 떠났다. 해외 거주 루마니아인은 수백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건설과 농업·의료·돌봄·운송과 전문기술 분야에서 일한다. 본국으로 보내는 송금은 가족의 생활과 주택·교육·사업을 돕는다.
하지만 의사와 간호사·기술자·청년층의 대규모 이주는 국내의 인력 부족과 지역소멸을 심화시킨다.
일부 농촌마을에는 아이와 노인만 남고 부모가 해외에서 일하는 가족도 생겼다. 경제적 송금이 가족의 장기적인 분리와 정서적 문제를 완전히 보상할 수는 없다.
최근에는 임금상승과 정보기술·창업 기회를 찾아 귀국하는 사람도 있다. 동시에 루마니아는 네팔·스리랑카·베트남 등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국가로 변화하고 있다.
인구감소와 지역격차
루마니아 인구는 1990년 약 2,300만 명에서 현재 1,900만 명 안팎으로 감소했다. 낮은 출생률과 해외이주·고령화가 함께 작용했다.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티미쇼아라 등 주요 도시는 투자와 일자리가 늘었지만 동부와 남부의 농촌지역에서는 인구가 빠르게 줄었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교육·의료·교통 격차도 크다. 일부 농촌주민은 상하수도와 안정적인 의료서비스를 충분히 이용하지 못한다.
로마인 공동체와 빈곤가정의 어린이는 조기중퇴와 학교분리,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일 위험이 높다.
유럽연합 기금을 대형 기반시설에 사용하는 것과 함께 보육·학교·병원, 지방의 일자리와 행정역량에 투자해야 인구감소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
부패에 맞선 시민사회
공산주의 붕괴 이후 루마니아 정치에서는 정당과 기업·행정기관의 부패가 오랫동안 문제가 됐다.
유럽연합 가입 과정에서 반부패검찰과 사법제도가 강화됐고 고위 정치인과 시장·공무원이 수사를 받거나 유죄판결을 받았다.
2017년 정부가 부패범죄의 처벌을 완화하려 하자 부쿠레슈티와 전국 도시에서 수십만 명이 촛불과 국기를 들고 시위했다. 민주화 이후 최대 규모의 시민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정부는 문제의 긴급명령을 철회했다. 이 시위는 유럽연합의 압력뿐 아니라 국내 시민사회가 법치와 공공기관의 책임을 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반부패 수사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비판과 사법기관의 권한·독립성을 둘러싼 논쟁도 계속된다.
미티테이와 사르말레의 식탁
루마니아 음식은 발칸과 오스만·헝가리·오스트리아·슬라브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옥수수와 돼지고기·치즈·양배추·감자와 사워크림을 많이 사용한다.
사르말레는 다진 고기와 쌀을 양배추나 포도잎에 싸서 천천히 익힌 음식이다. 크리스마스와 결혼식·가족행사에 빠지지 않는다.
머멀리거는 옥수수가루를 끓여 만든 음식으로 치즈와 사워크림, 고기요리와 함께 먹는다. 과거에는 농민들의 소박한 주식이었지만 현재는 대표적인 전통음식이 됐다.
미티테이 또는 미치는 다진 고기에 마늘과 향신료를 넣어 작은 원통형으로 구운 요리다. 빵과 겨자·맥주를 곁들이며 야외축제와 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초르버는 신맛을 낸 수프를 통칭한다. 밀기울을 발효한 보르슈나 식초·레몬 등을 이용하며 고기와 채소·콩 등 다양한 재료를 넣는다.
디저트 파파나시는 치즈반죽을 튀기거나 삶아 사워크림과 과일잼을 올린다. 코조나크는 견과류와 코코아·양귀비씨 등을 넣은 달콤한 발효빵이다.
전통과 현대가 다시 연결되는 나라
루마니아는 로마제국의 언어적 유산과 다키아의 기억, 정교회와 오스만·합스부르크 문화가 겹쳐 있는 나라다.
트란실바니아의 성과 드라큘라 전설로 세계에 알려졌지만 실제 루마니아의 모습은 훨씬 다양하다. 다뉴브삼각주의 어촌과 카르파티아산맥의 목동, 몰다비아의 벽화수도원과 현대적인 정보기술 도시가 함께 존재한다.
차우셰스쿠 독재와 1989년 혁명을 겪은 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유럽연합 체제로 이동했지만 부패와 정치적 불안, 지역격차와 인구유출은 여전히 큰 과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흑해의 긴장은 루마니아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였다. 동시에 안보와 민족주의를 앞세운 허위정보가 민주적인 정치과정을 흔들 수 있다는 위험도 드러냈다.
루마니아는 단순히 ‘드라큘라의 나라’가 아니다. 다키아와 로마, 동방정교회와 서유럽, 농촌의 전통과 첨단산업이 카르파티아산맥 안팎에서 새로운 유럽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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