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ght is Color, and Shadow Is The Absence Of Color / “Dancing Alone” (4)
(J.M.W. Turner, 1818, English painter)
예술과 문학이 있어 인간의 삶은 찬란하다. 예술과 문학은 사유에 기반한다. 우리가 사유하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 위치에 인공지능이 오를 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식은 이제 AI를 넘을 수 없다. “가로 세로 19줄 바둑판은 점 361개다. 바둑 돌 놓는 수는 약 2×10의 170승(거듭제곱)으로 그 값은 천체물리학에서 말하는 우주 전체 원자 개수(약 12×10의 78승)보다 크다.”고 한다. 4천년 동안 같은 경기가 한번도 없었다고 하는 무한의 수 바둑경기를 ‘알파고’가 점령했을 때 우리는 전율을 느꼈다.
3천 억개의 책과 문서를 학습한 챗GPT 능력에 세계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인간은 그의 능력을 갸늠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모든 것을 질문하고 대답을 기다린다. 마치 신의 대답을 기다리 듯. 만약 AI가 ‘그림자’를 상상하고, 그 의미까지 스스로 사유(思惟)한다면, 과연 인간만 ‘신성한 존재’일까?
19세기 화가 터너는 “빛은 색이니, 그림자는 색의 결핍”이라고 철학적인 정의를 했다. 챗GPT는 “그림자는 빛이 물체에 닿아서 생기는 어두운 영역으로, 물체가 빛을 가리면 그림자가 만들어진다. 즉, 물체에 의해 가려진 빛이 도달하지 못한 공간을 말한다. 그림자는 빛의 각도와 세기, 그리고 물체의 크기와 모양 등에 따라 형태와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과학적으로 답했다.
소설 속에도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독일작가 아데르베르트 폰 샤밋소(Adelbert von Chamisso) 「그림자를 없앤 남자 (Peter Schlemihl: The Shadowless Man)」에 나오는 슈레미르는 무진장 금화가 손에 들어 온다는 마법의 유혹에 못이겨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판다. 부(富)를 손에 넣은 슈레미르는, 반대로 「그림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 자신의 존재 의미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가는 상상력으로 그림자에 대한 세계관을 구축했다.
빛을 통해 색을 인지한다. 사유의 ‘빛’이며 다양한 가치관의 ‘색’이다. 사유가 멈추면, ‘존재’ 만큼 색도 많다는 것과 색의 결핍 그림자에 ‘막후인물(幕後人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누군가”의 그림자이고, “누군가”는 나의 그림자이다. 그 존재를 사유하고 인지하게 된다면 비로소 빛을 느끼게 된다.

라멘몰에도 라멘몰을 존재하게 하는 절대적인 그림자가 있다. 미국 곳곳에서 수시로 접속하여 빛을 내는 존재들이다. 이들이 구매를 일으키고 사라지면 또 다른 그림자 빛이 나타난다. 그들이 “동시에” 하늘의 별처럼 라멘몰에 가득했으면 좋겠다.

처음 라멘몰을 시작했을 때 하루 종일 이 그림자 빛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루에 천 개, 만 개의 빛이 나타나면 각각 20만불, 100만불의 매출이 발생한다. 구원자를 기다리 듯 나는, 이 그림자 빛을 기다린다.

(“홀로 추는 춤“, 라멘몰닷컴 미국 생존기)
